창녕성씨인물가문을 빛낸 선조(우계 성혼)
가문을 빛낸 선조(우계 성혼)

 

우계 성혼(成渾)
1535(중종 30)~ 1598(선조 31). 조선 중기의 학자로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이황의 주리론과 이이의 주기론을 종합해 절충파의 비조가 되었다. 자는 호원(浩源), 호는 우계(牛溪)·묵암(默庵)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좌의정이 추증된 성수침(成守琛)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파평 윤씨. 서울 순화방에서 태어났으며, 1539년 파산(坡山) 우계로 이사하면서 경기도 파주에서 자랐다. 17세에 신여량의 딸과 혼인했으며, 그해 진사·생원 양시에 합격했으나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백인걸에게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당시 같은 고을에 살던 율곡 이이와 도의지교를 맺었다. 선조 초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현감 등을 제수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파산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동서분당기에는 이이·정철 등 서인과 정치노선을 함께 했다. 1589년 기축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이조참판에 등용되었으며, 이때 북인 최영경의 옥사 문제로 정인홍 등 북인의 강렬한 비난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중에는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이 되었으며, 1594년 좌참찬으로서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주화론을 주장했다. 학문의 경향은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에 걸쳐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한 왕복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서신에서 퇴계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며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했다. 이이는 그의 학문을 평가해 “의리상 분명한 것은 내가 훌륭하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한다.”고 했으며, 외손인 윤선거는 그가 학문에 있어서 하나하나 실천하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의 학문은 이이와 함께 서인의 학문적 원류를 형성하였으며, 문인으로는 조헌·황신·이귀·정엽 등이 있다. 그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절충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외손인 윤선거, 윤증에게 계승되면서 소론학파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1602년 전일에 기축옥사에 관련된 연유로 삭직되었으나, 1523년 인조반정 이후 복관되었다. 좌의정에 추증, 15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창녕의 물계서원, 해주의 소현(紹賢)서원, 파주 파산(坡山)서원 등에 제향 되었다. 문집 《우계집》과 저서에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爲學之方)》 등이 있다.
KakaoTalk_20150503_172537867.jpg

DSC06197.JPG

KakaoTalk_20150503_171446276.jpg

DSC06227.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