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성씨인물가문을 빛낸 선조(수초)
가문을 빛낸 선조(수초)

 

수초(守初)
1590(선조 23)∼1668(현종9).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창녕 성씨이다. 호는 취미(翠微), 자는 태혼(太昏).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의 후예로서 성균관 북쪽의 이름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출가의 뜻을 품었으나 형이 허락하지 않자 몰래 설악산으로 가서 경헌의 제자가 되었다. 1606년(선조 39) 두류산에서 당대 최고의 고승인 부휴로부터 계를 받았다. 부휴는 그가 큰 인물이 될 것을 알고 제자 각성에게 특별히 지도할 것을 부탁했다. 그 뒤 여러 고승들을 찾아가서 지도를 받고 서울로 올라가 이름 있는 유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유학에 관한 지식을 넓혔다.

1629년(인조 7) 각성의 법을 이어받고 옥천 영축사에서 개당하여 많은 제자를 지도했다. 당시 상국인 장유는 북한산에 절을 짓고 그를 청했으나 사양하고 관북·관서지방의 오도사·설봉사 등을 편력하면서 설법했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영남과 호남지방 등지를 다니면서 전란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교화했다. 어느 때 선가의 중요 전적인 《선문염송 禪門拈頌》을 읽다가 “모든 문자 언어가 이미 다 되어 좁쌀알과 같아져 버렸으니, 거기 또 무슨 맛이 남아 있겠는가.”라고 했다.

1668년 정월, 주위의 승려들에게 영북으로 갈 것을 고하고, 2월에 오봉산 삼장사로 옮겼으며 그해 6월에 자신이 기거하던 방을 돌면서 ‘무량수불’을 염불하다가 서쪽을 향해 앉아 그대로 입적했다. 저서로는 《취미대사시집 翠微大師詩集》 1권이 있으며, 부도는 중주의 오봉사, 학성의 설봉사, 승평의 조계사 등에 세워졌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성총·해활·민기 등이 있으며, 이들은 조선시대의 불교계를 주도한 고승들이다.

그는 선교일치라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나아가 정토문과 성도문의 2문을 합일시키려 한 회통적 성격을 반영시킨 고승이다. 특히 회통의 이론적 기반을 화엄사상에 두고 원융무애한 경지를 모색했다. 또한 선승인 그가 정토왕생과 타력신앙을 주장한 점은 한국 불교사상사에서 주목되는 한 유형이다. 유학에 대한 식견은 당시의 유학자인 김육·이식·이안눌 등으로부터 높이 평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