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성씨인물가문을 빛낸 선조(성희안)
가문을 빛낸 선조(성희안)

 

성희안(成希顔)
1461년(세조 37년) ~ 1513년(중종 8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우옹(愚翁), 호는 인재(仁齋)이다. 부친은 돈녕부판관 성찬(成瓚)이며, 모친은 종실인 덕천군 후의 딸이다. 1480년(성종 1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85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이어 부수찬으로 승진했으며, 당시 성종의 숭유정책에 신진으로서 국왕이 많은 자문을 구할 만큼 학문에 깊었다. 그 뒤 예빈시주부(禮賓時主簿)가 되었다가 관위가 누진되어, 연산군이 즉위해서도 문무의 요직을 거쳐, 1499년(연산군 5년)에는 군기시부정(軍器侍副正)으로서 서정도원부 이계전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했다.

1503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사은사(謝恩使)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왕세자 책봉에 대한 하례를 하고 돌아왔다. 이어서 형조참판이 되어 가선대부에 올랐고, 1504년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總府都總官)을 겸하고 있었으나, 연산군이 양화도의 망원정에서 유락을 즐길 때, 풍자적이고 훈계적인 시를 지어 올려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무관의 말단직인 부사용(副司용)으로 좌천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연산군의 폭정은 날로 더해져 민심 또한 흉흉해지고 있었다.

1506년, 박원종과 함께 반정을 도모해 명망가이던 유순정을 참여시키고 신윤무, 박영문, 홍경주 등에게 군대를 동원시켜 진성대군을 옹립해 거사했다. 반정이 성공하자 거사의 주역으로서 병책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策奮의決策翊運靖國功臣) 1등에 책록 되고, 창산군(昌山君)으로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해 반정의 뒤처리를 했다. 거사에 있어 앞장서서 큰 공을 세웠으나, 벼슬은 차례가 있다고 하면서 박원종, 유순정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셋째 번에 서기도 했다.

한편 중종 즉위에 명나라의 고명이 어렵게 되자, 그가 청승습사(請承襲使)로 명나라에 가서 일을 성사시키고 돌아왔다. 이어서 실록총재관(實錄總裁官)이 되어 <연산군일기 >의 편찬을 주관했다. 1509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고, 이듬해에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도제찰사와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겸임해 군무를 총괄했다. 그 뒤 반정공신의 다수를 이루는 무관을 옹호해 사풍을 능멸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오히려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했고, 1513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