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성씨인물가문을 빛낸 선조(성호징)
가문을 빛낸 선조(성호징)

 

성호징(成虎徵)
1625(인조 3)∼1694(숙종 20).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병여(炳如).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운한(雲翰)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진해의 딸이다. 1666년(현종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사록(司錄)과 전적을 지내고, 예조·병조의 좌랑과 고산찰방(高山察訪)·함경도사(咸鏡都事)를 지냈다. 1672년에 지평, 이듬해에 장령·정언에 올라 노론에 속한 그는 당시 같은 노론이던 민정중과 김만중·이숙·이선 등이 남인에게 몰려 죄를 입게 되자 이를 논구하다가 죄를 입어 강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숙종 즉위 직후 남인 윤휴 등이 집권하자 두문불출하다가,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정언에 복직하고, 1682년에는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어서 장령·지평을 거쳐 죽산부사 재임 시에는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여러 개 세워졌다. 1684년 사간으로 있으면서 남인 허목·홍만조·이현조 등의 죄를 논했고 이어 동부승지·좌승지·판결사·형조참의·공조참의를 역임했다.

1688년에 여주목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기사환국으로 노론이 쫓겨나자 두문불출했다. 1694년 갑술옥사 뒤 민비가 복위되었으나 남구만 등 소론파가 집권하매 관직에 적극적인 참여는 있을 수 없고 판결사에 제수되었다. 그는 노론으로서 당쟁이 극심해 30여년의 관직생활이 평탄하지는 못했으나, 개인적인 인품은 후덕하고 애군·효친이 지극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