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성씨인물가문을 빛낸 선조(성제원 1506~1559)
가문을 빛낸 선조(성제원 1506~1559)

 

성제원 (成悌元)1506~1559)
公의 호는 동주(東州)이고 회곡공파 11세 이시다 어려서부터 뛰어난바가 있어 불과 14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그해에 기묘사화가 벌어져 많은 현인이 화를 당함을 보시고 책을 덮으며 “당고의 화가 현세에도 일어났구나” 하시고 탄식하며 은둔의 뜻을 가졌다고 한다, 후에 성현의 학문에 심취하엿으며 김광필의 성리학을 유우로부터 수학하여 마침내 심오한 뜻을 깨달았으며 당세의 유명한분들과 교분하며 견문을 넓혀갔다.
公은 효행이 남달랐으니 달전 언덕 뒤 옥정봉위에 축대를 쌓고 항상 모친의 묘를 바라보면서 울었다. 사람들이 그 축대를 “망묘대”라고 칭했다.
공은 48세에 유일(학력이 높은분들을 천거하여 관직을 제수)로 보은현감으로 재직하시다 사직하니 고을 사람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고 공의 선정을 기록하여 한권의 책을 내엇다.
公의 인품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에 성제원은 의지가 높고 친구를 대함에 한결같이 성신으로 하였으며 농담을 잘하고 온화 하였으며 효가 극진했으며 자연을 사량했으며 의리를 따르고 벼슬살이를 욕심없이 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하였다.
公은 16세기 중반의 대표적인 도학군자 명현이셨으니 경학과 성리학에만 국한된것이 아니라 도가적인 삶의 정취를 즐기고 불도의 정신세계를 인정하면서 그 기반은 유가적인 정조를 가지고 있었다.
公은 고결하여 젊어서부터 공리(功利)와 과거에 마음을 두지않고 유유자적하고 풍월을 읊으며 회포를 풀었으니 큰 세상에서 큰 뜻을 펼치고 싶었지만 세상이 혼탁하여 제대로 펴지 못하고 은둔고담의 세계를 살았다.
公이 보여주었던 그 순수한 정신과 고아한 정취. 그리고 명리에 대한 초연, 불변의 기개는 선비정신이 지니는 지조의 바탕이었으며 16세기 후반기이후 한국 도학정신의 밑거름이었다.
公이 남긴 저술이나 기록은 산실되어 겨우 시문집 “동주선생보고” 3권 1책(목활자본)이 전해진다. 
公은 창녕의 물계서원, 공주의 충현서원, 보은의 상현서원과 금화서원에 배향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