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성씨인물가문을 빛낸 선조(성수침)
가문을 빛낸 선조(성수침)

 

성수침(成守琛)
1493(성종 24)∼1564(명종 19). 조선 중종·명종 때의 성리학자로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聽松)·죽우당(竹雨堂)·파산청은(坡山淸隱)·우계한민(牛溪閒民). 대사헌 세순(世純)의 아들로 아우 수종(守琮)과 함께 조광조의 문인으로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에 천거되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와 그를 추종하던 많은 사림들이 처형 또는 유배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송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두문불출했다.

이때부터 과거 보는 학업을 폐하고 <대학>과 <논어> 등 경서공부에 전념했다. 1541년 유일(遺逸)로서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처가가 있는 우계(牛溪)에 은거했다. 1552년(명종 7)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예산(禮山)현감·토산(土山)현감·적성(積城)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564년 사지(司紙)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퇴했다.

죽을 때에는 집안이 가난해 장례를 지낼 수가 없었다. 이에 사간원의 상소로 국가에서 관곽과 쌀·콩과 인부를 지급해주고 사헌부집의에 추증했다. 조선 초기에 성리학의 토착화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도학사상으로 나타났거니와 이들은 대의명분과 요순의 지치(至治)를 현실에 구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이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은일을 일삼고 산간에 묻혀 자기수양에 힘써 이러한 학풍을 몸소 실천했다.

그의 문하에서 아들 혼(渾)을 비롯한 많은 석학들이 배출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파산(坡山)서원과 물계(勿溪)의 세덕사(世德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청송집>이 있으며, 글씨를 잘 썼는데 〈방참판유령묘갈 方參判有寧墓碣〉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