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성씨인물가문을 빛낸 선조(성수익)
가문을 빛낸 선조(성수익)

 

성수익(成壽益)
1528(중종 23)∼1598(선조 3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덕구(德久), 호는 칠봉(七峯). 장흥고령(長興庫令) 예원(禮元)의 아들이다. 1552년(명종 7)에 생원이 되고 경릉참봉(敬陵參奉)·돈녕부봉사를 역임했다. 1559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에 부임되었다가 저작(著作)으로 옮겼으며, 그 뒤 예문관검열·대교·검열·성균관전적·형조정랑·감찰·강원도도사·형조정랑 겸 춘추관기사관·호조정랑 등을 역임했다.

1568년(선조 1) 어천도찰방(魚川道察訪)·평안도도사·호조정랑 등을 역임했고, 1568년에 개성경력(開城經歷)이 되어서는 정몽주의 옛 집터에 사당을 세우고 서경덕과 함께 제향했다. 1570년 성균관직강·사예가 되었으며 그 뒤 부평부사·사옹원정·군자감정·상의원정·회양부사 등을 역임하고, 1586년에 동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예부를 통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했고, 1590년에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창산군(昌山君)에 책봉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해 영유에 머물 때 형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제수되었고 왜적이 물러가자 왕비를 해주에 호종했다. 1595년 개성유수가 되어 백성을 안접시키고 향교를 중건해 학풍을 진작시켰다.1597년 정유재란 때 부총관으로 왕비를 수안으로 호종하는 등 과로로 병을 얻어 이듬해 해주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