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성씨인물가문을 빛낸 선조(성세창)
가문을 빛낸 선조(성세창)

 

성세창(成世昌)
1481(성종 12)∼1548(명종 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자는 번중(蕃仲), 호는 돈재(遯齋), 예조판서 현(俔)의 아들이다. 1501년(연산군 7) 진사시에 합격, 1507년(중종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홍문관정자에 임용되었다. 이어 저작(著作)·박사(博士)로 승진되었고 사간원정언을 지냈다. 1509년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인사행정의 불공정한 처사로 서반(西班)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그 뒤 다시 동반(東班)으로 복직되어 사간원헌납·홍문관교리·사헌부집의 등 삼사(三司)의 요직을 거쳤고, 그 뒤 사간원 사간으로서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을 겸임했다. 1517년 홍문관 직제학으로 있을 때 조광조 등이 현량과를 실시하려 하자, 그 폐단을 지적하고 불가함을 주장했다. 1519년 정국이 위태롭게 되어가자 평소에 친하였던 김정·이자·김수온의 의기를 충고하고 자신은 신병을 이유로 파주의 별장에 거처하면서 화를 피했다.

1521년 다시 홍문관 직제학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형조참판에 임명되었고 주문사(奏聞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관하 선산군수가 여악(女樂)을 설치한 것이 빌미가 되어 탄핵을 받고 일시 파직되었다. 그 뒤 성균관대사성·동지중추부사·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정광필이 영의정이 되면서 예조참판·이조참판이 되어 기묘사화에 죄를 입은 사람들을 등용시키는 데 힘썼다.

그 뒤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530년 대사헌·홍문관부제학으로 있으면서 권신 김안로를 논척하려다가 도리어 평해에 유배되었으나 1537년 김안로와 그 일당이 숙청되면서 귀양에서 풀려나 한성부우윤·형조판서· 이조판서·대사헌·예조판서 등 요직을 역임했다. 일시 지중추부사로 있다가 곧 형조판서가 되었고 이어서 예조판서·호조판서·의정부우찬성에 올랐다.

1545년(인종 1)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으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좌의정으로 임명되었고, 판중추부사·영경연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 등을 겸임했다. 학식과 문장이 뛰어나 오랫동안 홍문관에서 봉직했으며 문형(文衡)을 맡아 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필법에 뛰어났고 글씨·그림·음률에 정통하여 3절(三絶)이라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