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성씨인물가문을 빛낸 선조(성세명)
가문을 빛낸 선조(성세명)

 

성세명(成世明)
1447(세종 29)∼1510(중종 5).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여회(如晦), 호는 일로당(佚老堂). 아버지는 좌참찬 임(任)이며, 어머니는 군자감주부 허말석의 딸이다. 1468년(세조 14) 사마시를 거쳐 진사로서 1475년(성종 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483년 정언을 지내고 공조좌랑·지평·전한(典翰) 등을 역임했다.

1489년 왕명으로 경기지방에 암행어사로 나아가 농작의 상태를 조사하고 돌아와 이듬해 집의에 올랐는데, 이때 인사부정을 묵인했다하여 홍문관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1493년 전한으로 복직되어 임광재 등 외척의 횡포를 견제할 것을 주장했고, 이듬해 부제학이 되어서는 시무책을 제시하여 토지제도와 공법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언론을 중시할 것을 제의하였다.

1495년 연산군이 즉위하자 대사간이 되어 여러 대군과 상궁의 복호를 파할 것을 주장하고 이어 병조참지가 되어 폐비 윤씨의 추존을 강경히 반대했다. 그 뒤 동부승지· 좌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고 동지돈녕부사로 체직되었다가 개성부유수·형조참판 등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대사헌이 되었으나 갑자사화로 한성부좌윤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진향사(進香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연산군에게 명나라 황제는 경연에 부지런히 임한다는 말을 했다가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다시 겸지춘추관사가 되어 <연산군일기>를 수찬했고, 1508년(중종 3) 지돈녕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평안(平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