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4(태종 14).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으로 초명은
석연(石珚)이었으나 국왕의 휘(諱)를 피하여 석인(石因)으로 개명했다. 자는 자유(自由), 호는 상곡(桑谷). 아버지는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여완(汝完)이며, 석린(石璘)·석용(石瑢)의 아우이다. 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해 고려에서 지평(持平)·경연강독관(經筵講讀官)을
역임했다. 다시 조선왕조에서 강원도관찰사·충청도관찰사를 거쳐 경연관·사헌부대사헌·예문관대제학과 형조·호조·예조 등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예조판서로서 조정의 일을 의논 중에 졸도해 순직했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