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성씨인물가문을 빛낸 선조(성삼문)
가문을 빛낸 선조(성삼문)

 

성삼문(成三問)
1418(태종 18)∼1456(세조 2).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충청남도 홍성(洪城)출신.

(가계와 관직) 부친은 도총관(都摠管) 승(勝)이며, 모친은 현감 박첨의 딸이다. 공의 유년기에 대한 기록이 없었는데, 근년에 파주시 법원읍의 ‘파주시 역사문화체험장’ 개설을 위한 모임에서 (김교하 외 법원읍민, 파주시 문화원 전·현 원장, 파주시청) 조사 중 매죽헌의 유년기를 보낸 곳으로 추정되는 곳을 확인했다. 이곳은 매죽헌의 조부이신 양혜공(회곡 7世) 달생(達生)께서 기거하셨던 곳으로 지금도 成지터 또는 成부터로 불리며 집터 뒤쪽 문수암자에서 수학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계곡은 먹물이 많이 흐른 골짜기라 개묵골이라 불린다.

1438년(세종 20)에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1447년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수찬(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올라갔다. 1442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독 禮記大文諺讀>을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이개 등과 함께 이를 도왔으며, 특히 신숙주와 같이 명나라 요동을 여러 번 왕래하면서 그곳에 유배 중인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을 만나 음운을 질문했다. 또한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의 제도를 연구해 와서 1446년 9월 29일에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1453년(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으면서 그 추종자들과 함께 그에게 내린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1454년 집현전 부제학이 되고 이어서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그해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 선위를 강요할 때에 그가 국새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세조가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단종복위 운동) 그는 아버지 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중림·박팽년·유응부·허조·권자신·이개·유성원 등을 포섭해 단종의 복위운동을 계획하면서 거사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456년(세조 2)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향응을 베풀기로 한 것을 기회로 삼아, 왕의 운검(雲劒)을 맡은 성승과 유응부로 하여금 세조와 측근을 처치하도록 계획했다. 그 나머지 중신들은 여러 무사들이 나누어 제거하기로 정했다. 그리고 김질에게는 그의 장인인 정창손으로 하여금 상왕복위를 주장하도록 설득하라 하였다.

(복위운동의 실패) 그러나 거사 당일 갑자기 한명회의 제의로 세자와 운검의 입장이 폐지되자 거사를 중지하고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거사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한 김질이 세조에게 이를 밀고하는 바람에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다음날 달군 쇠로 다리의 살을 뚫고 팔을 잘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신숙주의 불충을 꾸짖는 기개를 보였다.

6월 8일 성승·이개·하위지·유응부·박중림·김문기·박쟁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형을 당했다. 거사 관련자 70여 명은 각각 죄명에 따라 혹형·처형·유배 등을 당했는데, 그중에서도 성삼문은 멸문의 참화를 당했다. 아버지 승을 비롯하여 동생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과 아들 맹첨(孟瞻)·맹년(孟年)·맹종(孟終)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되어 혈손이 끊기고 아내와 딸은 관비가 되었으며, 가산은 몰수되었다.

(신원과 추모) 성삼문은 대역죄인으로 처형당했으나 그의 충절을 기리는 움직임은 사림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김종직·홍섬·이이 등이 그의 충절을 논했으며, 남효온은 〈추강집 秋江集〉에서 그를 비롯하여 단종복위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명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겼다. 이후 이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다.

마침내 1691년(숙종 17)에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성삼문 등 사육신의 처형 후 그들의 의기와 순절에 깊이 감복한 한 의로운 인사가 시신을 거두어 한강 기슭 노량진에 묻었다. 또 처형 직후 전국을 돌면서 사육신의 시신을 전시할 때, 그의 몸 일부를 묻었다는 묘가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에 있다. 장릉(단종능) 충신단에 배향되었으며, 강원도 영월의 창절사, 서울특별시 노량진의 의절사, 충남 공주 동학사의 숙모전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 〈매죽헌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