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은 판서공 공필의 증손이며 광록대부 삼중대광(三重大匡)좌정승 휘
유득의 아들로 일찍이 학문을 성취 하였으며 고려 공민왕때 제과에 급제한후 보문각 직제학을 20여년 근무 하였으나 조정이 극도로 문란함을 탄하고
10여년간 은둔생활을 하셨다. 이태조가 개국하자 王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李가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하시었다. 처자에게 이르기를 나는 대대로
국은을 받았는데 살아서는 국가에 보답하지 못하였고 죽어서는 망국대부가 됨을 면할수 없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선조를 뵙겠는가 내가 죽더라도
시신마저 거두지 말라 하시고 처자를 창녕으로 보내셨다. 고려가 망하고 이태조가 경덕전에 과거를 베풀고 명류들을 초유 하였으나 관을 벗어 나무에
걸고 고개를 넘어 피하며(이고개를 부조현이라 칭함) 두문동에서 끝까지 충절을 지키셨다. 충절을 지킨 분들이 72人으로 세칭 두문동 72賢이라
칭한다. 이조 영조16년에 왕은 “고려충신부조현”이란 글을 돌에 새겨 표시케 하고 영조27년 두문동에 비를 세웠다. 公은
표절사(表節祠)에 배향되었고 고종9년에 정절(貞節)이라 시호(諡號)가 내렸으며 창녕 물계서원에 추향 되었다. 우리 성문은 고려말의
성사제, 성부(두문동72현중 한분)의 충신과 조선조의 사육신 성삼문, 생육신의 성담수등 충효전가(忠孝傳家)한 가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