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성씨인물가문을 빛낸 선조(성대중)
가문을 빛낸 선조(성대중)

 



성대중(成大中)
1732(영조 8)∼1812(순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 자는 사집(士執), 호는 청성(靑城). 부친은 찰방 효기(孝基)이다. 1753년(영조 29)에 생원이 되고 1756년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그는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순조로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할 처지였으나, 영조의 탕평책에 편승한 서얼들의 신분상승운동인 서얼통청운동(庶蘖通淸運動)에 힘입어 1765년 청직(淸職)에 임명되어 서얼통청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1763년에 통신사 조엄을 수행해 일본에 다녀왔고, 1784년(정조 8)에 흥해(興海)군수가 되어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정조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신분적인 한계에 묶여 부사(府使)의 벼슬에 그쳤다. 학맥은 노론 성리학파 중 낙론계(洛論系)에 속하여 성리학자로서의 체질을 탈피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당대의 시대사상으로 부각된 북학사상에 경도하여 홍대용·박지원·이덕무·유득공·박제가 등과 교유하면서 이들에게 가학 및 스승 김준에게서 전수받은 상수학적인 학풍을 발전적으로 계승·전달해 북학사상 형성에 일익을 담당했다. 낙론계 성리학자와 북학파의 중간적 위치에 처해, 정조대에 추진된 문체반정의 정책에 적극 호응해 북학파와 다른 성향을 보이는 점도 바로 이 중간적 위치와 신분적 약점 때문으로 파악된다. 저서로는 《청성집》 10권 5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