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성씨인물가문을 빛낸 선조(성건)
가문을 빛낸 선조(성건)

 

성건(成健)
1439(세종 21)∼1496(연산군 2).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강(子强)이고 형조참판 순조(順祖)의 아들이며, 영의정 준(俊)의 동생이다. 1462년(세조 8) 사마시에 합격하고 1468년 춘장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당시 건주야인을 토벌하는 진서대장군 구치관의 종사관이 되어 변경을 돌보았다. 

이듬해 성균관 전적이 되어 형들과 함께 전라도 영암·광주지방에서 일어난 도적의 무리를 소탕하는 대책을 제시하였다. 1476년(성종 7) 사헌부지평으로 당시의 권신 한명회의 권력남용을 탄핵해 결국 체직시켰다. 그 뒤 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을 지내고, 1479년 사헌부장령으로 언관(言官)의 우대와 언론의 보장을 주장하여 성종의 동의를 받았다. 

이어 사도시첨정(司導寺僉正)으로 궁중의 살림을 주관하였고, 1482년 사헌부집의를 거쳐 홍문관전한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김종직(金宗直) 등과 교유하며 함께 경연에 참여해 내수사 장리(長利)의 폐단을 지적하고 수령의 인사관리를 엄히 할 것을 주장했다. 그 뒤 동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좌승지를 역임하고 1486년 도승지에 올랐다. 이듬해 경기관찰사가 되어 연해도서지방에 둔전을 설치하고, 곧 내직으로 옮겨 예조참판과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이듬해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89년 공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도순찰사가 되어 해안방어를 점검하고 조창 이전 문제를 검토해 부분적으로 실시했다. 그 뒤 형조판서·우참찬·예조판서·형조판서를 역임했다. 성품이 충직해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특히 성종의 신임이 두터웠는데 사람들은 일찍이 종친 계성군(桂城君)이 그의 집에서 자라 국왕과 왕대비가 비호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