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성씨인물가문을 빛낸 선조(독곡 성석린)
가문을 빛낸 선조(독곡 성석린)


 

독곡 성석린
※참고: 이 글은 세종(世宗) 5년1월12일 세종대왕이 내린 제문(祭文)으로、세종이 세자시절 세자부(世子傅:스승)이었던 독곡성석린선생(1339~1423,향년86세)이 사망하자 三日間 輟朝하고 悲痛한 마음을 담아 그간의 업적과 노고를 나타내어 제문을 지었으며 禮官을 보내어 致祭하였다.
:제문 (賜祭文)
光嶽鍾秀克生正人國家將興賴爲元氣慨英靈之已逝宜恤典之崇頒惟卿名門甲姓間世雄才早捷文場橫翔藝苑以麟鳳瑞世之資蘊房杜經綸之業而文之以董韓學術之精深他如詩律之嚴筆法之妙皆其餘事是故當雲雷屯難之日遇知於聖祖及姦宄㭬訌之時佐命於太宗繇是登台司而承弼厥辟作元宰而德潤生民鎭定乎震憾擊撞調劑乎辛甘燥濕身佩安危爲朝廷倚重者盖數十年餘矣其勳名偉績藏之盟府紀于策書在人耳目昭如日星嗟予寡人遭天不吊將求攸濟正惟聖祖昭考之舊臣是仰顧瞻在庭十數臣外罔有存者良用惻然卿以四朝之老蔚爲三壽之朋洪範之五福純備汾陽之終始無虧元龜喬木眷注匪輕胡不百年遽貽䀌傷永懷社稷之宗臣蓋享情文之異數肆修薄奠往慰貞魂於獻雲從龍風從虎勳盟重指於山河君視手臣視心報施何殊於存沒
사:제문 (賜祭文)
삼광(三光:, , )과 오악(五嶽: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삼각산)이 정기(精氣)를 모아 능히 정인(正人)을 낳았는데국가가 장차 흥왕하려 할 제 그의 힘으로 원기(元氣)를 삼았었다이미 가신 영령(英靈)을 슬퍼함에휼전(恤典)을 높이 내림이 마땅하도다. 경은 명문(名門)의 갑성(甲姓)이요간세(間世:수세기에 드문)의 웅재(雄才)이였다일찍이 문장(文場)에 승리(勝利)하여 예원(藝苑)에 이름을 떨치니세상에 빛나는 기린과 봉황의 자질로서 방현령(房玄齡:지모(智謀)에 뛰어난 자)과 두여회(杜如晦:판단력이 뛰어났음)(()나라 초기의 명재상들)의 경륜(經綸)을 쌓았고학문은 동중서(童仲舒:전한(前漢)의 학자)와 한유(韓愈: ()나라의 문장가(文章家))의 정심(精深)한 학술(學術)로 빛났으며기타 시율(詩律)의 엄정(嚴整)한 것이나 필법(筆法)의 정묘(精妙)한 것은 모두 여사(餘事)였다이런 까닭으로 시국이 어지러운 시기를 당하여 성조(聖祖태조)에게 인정을 받았고악당(惡黨)들이 분란(紛亂)을 일으킬 때에 태종(太宗)에게 천명(天命)을 도왔었다이로 말미암아 정승의 자리에 올라서 임금을 받들어 도왔으며수상(首相)이 되어 덕은 생민(生民)을 윤택하게 하였도다. 진감격당(震撼擊撞)하여 시국의 불안(不安)을 진정(鎭定)시키고신감조습(辛甘燥濕)으로 불평(不平)을 조화(調和)시키기도 하였다
몸소 국가의 편안함과 위태함을 걸머졌으니조정에서 그를 의지하여 믿은 지가 대개 수십여 년이나 되었다그 공명(功名)과 위대한 업적은 맹부(盟府)에 간수되고책서(策書)에 기록되어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해와 별과 같도다. 아 아내가 덕이 적은 사람으로 하늘이 돌보지 않는 때를 만나 장차 세상을 구제할 사람을 구하려 하매 바로 성조(聖祖)와 소고(昭考태종)의 구신(舊臣)에게 바라는 바 많았노라사방을 돌아보니조정에 있는 신하는 십여 명 외에 살아있는 사람이 없기에 참으로 슬퍼하였노라경은 네 조정(朝廷)의 원로(元老)로 호화롭게 삼경(三卿)의 짝이 되었다홍범(洪範서경의편명)의 오복(五福)을 다 갖추었으니분양(汾陽郭子儀)처럼 처음에서 끝까지 결함이 없었다. 큰 거북과 교목(喬木) 같은 존재에 기대함이 컸는데어찌 백세를 못 누리고 갑자기 이 애처로운 슬픔만 남겼는고사직(社稷)의 종신(宗臣)을 영원히 생각하니어찌 정문(情文)의 특별한 예수(禮數)를 올리지 않겠는가이에 박한 제물(祭物)을 갖추어 가서 정혼(貞魂)을 위로하게 하노라아아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르매훈공의 맹서가 산하(山河)를 가리키면서 무겁게 되고 임금은 신하를 손 같이 대하고신하는 임금을 심장같이 받드니보시(報施)가 어찌 생존하고 사망하는데 다를 수 있으랴
두여회(杜如晦) :
房玄齡 ·杜如晦 :당(唐)나라 초기의 명재상。 방현령은 지모(智謀)에 뛰어나고 두여회는 판단력이 뛰어났음.
한유(韓愈) :
董仲舒·韓愈 : 동중서는 전한(前漢)의 학자이며、한유는 당(唐)나라의 문장가(文章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