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성씨인물가문의 근현대인물(성인기)
가문의 근현대인물(성인기)
성인기(成仁基)
1907∼1966. 언론인·정치가로 충청남도 아산 출신. 아버지 환중(煥中)과 어머니 최치만 사이의 5남매 중 맏아들로 300섬지기 농가에서 출생했다. 16세에 서울로 중학시험을 보러 떠나기 20일 전에 이기순과 결혼했다.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하고 중동학교에 입학했으나, “서울 공부의 학비는 대주지 못한다.”는 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일본인 회사에서 학비를 벌며, 한때 선린상업학교의 야간부에서 학업을 보충하면서 중학교 학업을 마쳤다. 중동학교에서 교장이던 최규동의 도움으로 일본유학 교비생으로 뽑혀, 1933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귀국해 최규동으로부터 언론계 진출을 권유받아 조선일보 기자로 들어가 그해 12월부터 언론계생활이 시작되었다. 입사해 4년 동안 사회부기자로 활동했으며, 1938년 8월에 편집부기자, 같은 해 12월에는 논설위원으로 사설을 집필하기도 했으며, 1940년 8월에는 편집부차석이 되었다. 이때 조선일보가 폐간을 당해 약 3개월 휴면했다가, 1940년 11월 매일신보에 입사해 지방부장을 거치며 광복을 맞았다. 1940년 본부인과는 사별하고, 1941년 김수한과 재혼했다. 

광복 후 조선일보 복간사업에 참여해 1945년 9월 재입사 후 편집책임을 맡았으나 3개월 만인 1946년 2월 사상관계의 모함을 받아 주저함이 없이 회사를 떠났다. 같은 해 3월 성재경(成在慶)이 운영하던 대성출판사 고문으로 들어가 밀(Mill, J. S.)의 《자유론》, 손문의 《삼민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 등 정치사상 서적 5권을 번역해 간행했다. 1950년 2월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로부터 세 번째 부름을 받아 편집국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6·25동란이 발발, 인민군의 조선일보사 검색으로 직원 80여명이 북괴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루고 풀려난 일이 있으며, 같은 해 8월 5일 적치하의 서울을 탈출해 향리인 아산으로 피신했다. 

1951년 1월 조병옥의 연락을 받고 부산으로 내려가 피난지에서 조선일보를 발간했다. 같은 해 4월에는 수원에서 전시판을 발간했으며, 1958년 11월 천관우에게 편집국장을 물려주기까지 10년 가까이 조선일보로서는 최장수 편집국장을 지냈다. 그 뒤 부사장으로 만 2년 동안 재임했다. 4·19가 나던 1960년 7월 국회의원 총선에 향리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이듬해인 1961년 한국일보사 부사장으로 취임해 주필을 겸임했고, 1963년 민주공화당의 창당발기인이 되었다. 그해 11월 서울 영등포에서 공화당 공천을 받고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같은 해 5월 당무위원, 12월 정책위원을 거쳐 1964년 12월 홍보분과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