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경 : 개항기 광명 출신의 농민운동가. 성우경(成禹慶)[1842~1916]은 본관이 창녕(昌寧)으로, 시흥군 남면 유등리[현 광명시 학온동]에서 태어났다. 시흥군 남면 동학(東學)의 집강(執綱)으로 활동하면서 1898년(고종 35)과 1904년(고종 41) 두 차례에 걸쳐 다른 집강들과 함께 이른바 시흥농민봉기를 주도하였다. 1차 시흥농민봉기는 일본의 침략과 간섭이 노골화하던 1898년 7월 7일에 일어났다. 성우경은 송태현(宋泰鉉)·김회상(金會祥)[하북면 번대방 집강]·이동식(李東植)[서면 율일리 집강]·이덕정(李德鼎)[동면 봉천리 집강]·엄우영(嚴宇永)·나순길(羅淳吉)·나한녀(羅漢女)[상북면 당산리 소임] 등과 함께 시흥군 내 42명의 동·리 집강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리고, 전임 군수의 학정에 항의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7월 9일 각기 농민들을 동원하여 집회를 열고 1차 시흥농민봉기를 일으켰다. 1차 시흥농민봉기는 7월 28일에 일단 수습되었으나, 성우경은 주모자로 체포되어 수년간 옥고를 치렀다. 한편 일본은 조선 정부를 협박하여 경부선 부설권을 독점한 뒤, 1901년(고종 38) 경부선 공사에 착공하여 1904년 개통하였다. 일제는 경부선 철도를 건설하면서 영등포~수원 간 공사에 시흥군민을 강제로 동원하는 한편, 철도 연변(沿邊)의 토지를 무상으로 수용하였다. 이에 군민들은 일제의 탄압 정책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우경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침탈과 친일 관리들의 비행에 분개하여 2,000여 명의 군민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2차 시흥농민봉기를 일으켰다. 먼저1904년 9월 13일까지 6개 면 집강들에게 봉기 계획을 전달하는 한편, 시흥군내의 모든 가구마다 1명씩 반드시 집회에 참여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9월 14일 수천여 군민이 읍내 한천(漢川) 변에 집결하여 성유경의 사회로 집회를 열고 노무자를 모집한 관리들의 비행을 규탄하였다. 집회에 참가한 군민들은 이날 오후 3시경 시흥 관아로 몰려가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때 관아와 그 주변에 일본군 20여 명이 대기하고 있다가 시위대가 몰려오자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이에 흥분한 군민들은 투석전으로 맞서 군수 박우양(朴嵎陽) 부자가 희생되고, 일본인 2명이 참살되었으며 4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후 일본 군경이 증파되어 각 마을마다 군민들의 동정을 감시하는 한편, 주동자들을 색출하여 검거하였다. 성우경은 체포되어 경기재판소에서 주모자로 종신형을 선고받아 서대문교도소에서 복역하였으며, 2년 후 한성재판소에서 15년형으로 감형되었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하는 천추경절(千秋慶節)을 맞아 평리원의 기결수석방령(旣決囚釋放令)에 따라 고령임이 고려되어 특사로 풀려났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에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