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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여행기(성주억) - 이헌공 기제사를 다녀오고
작성자 관리자 [2016-03-11 10:3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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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염수당으로 1... (대전IC를 떠나며) 2016. 3. 8
禁苑春深花正繁(궁 안에 봄이 깊어 꽃이 한창 화사한데)
爲招嗜舊置金樽(옛 친구 초청하여 금잔에 술이 가득하게 잔치를 베푸시네)
天工忽放知時雨(하늘도 홀연히 때를 맞추어 단비를 뿌리시니)
便覺渾身雨露恩(온 몸에 내리신 비와 이슬의 은혜를 문득 깨닫겠네)...
조선을 개국힌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이헌공 성여완 할아버지를 목은 이색(李穡), 남양군 홍영통(洪永通)과 함께 옛 정을 생각하여 특별히 수레를 보내어 경회루에 초청하였다. 이에 公은 백의(白衣)로 연회(宴會)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정도전(鄭道傳)이 公에게 지어 올린 회유성(懷柔性) 찰언시(七言詩)다.
이헌공(怡軒公) 성여완(成汝完)... 公은 나의 18대조이시다. 공은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첨서밀직(簽書密直), 민부상서(民部尙書)를 역임하였다. 고려 때의 직함이라 정확한 업무는 파악할 수 없으나 정3품으로 추정된다. 공은 요승(妖僧) 신돈(辛旽)이 처형당하자 그와 친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우왕(禑王) 때 다시 복권되어 창녕부원군에 진봉(進封)되었다. 그 후 역성(易姓) 혁명에 의하여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열리자 아들들은 모두 조선 건국에 참여시키고 포천의 왕방산(王訪山)으로 은거(隱居), 일생을 마쳤다.
큰 아들 독곡 석린(石璘)은 영의정, 초대 한성판윤(시장), 둘째 회곡 석용(石瑢)은 대제학, 셋째 석인(石因)은 우의정을 지내어 초창기부터 명문 성씨 가문(家門)을 빛내었다. 한편 포천의 진산(鎭山)인 王訪山은 통일신라 때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이 산에 머물고 있을 때 헌강왕이 친히 행차하여 격려하였다 해서 왕방산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또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왕자들의 골육상쟁(骨肉相爭)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파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리에 머물렀는데 그곳을 지금도 용상동(龍翔洞)이라 불리고 있다.
신념(信念)을 지키어 굽히지 않는 충실(充實)한 태도(態度)를 뜻하는 節槪... 공의 현손(玄孫)으로 사육신인 성삼문, 생육신인 성담수로 이어져 세조의 왕위찬탈 때도 그 절개를 지켰다. 오늘날에도 소신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에 부응하여 신OO처럼 현실에 야합하는 정치인이 많아지고 있음은 개탄스러운 일이다. 이헌공은 창녕의 물계서원, 옥천사, 금성사 등에 배향되어 있다. 묘소는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에 모셔있지만 그의 아들과 더불어 창녕군 부곡면 학포리에 부조묘(不祧廟)인 염수당에 배향되어 있어 2월 29일 여행을 떠났다.
창녕 염수당으로 2... (김천을 지나며) 2016. 3. 8
7시 40분 집에서 나설 때는 날씨가 좋았는데 대전IC 근처에 가니 눈보라가 몰아친다. 하루 앞 일기도 몰라보는 우리 인생이다. 서울에서 7시 30분에 출발하는 대절버스가 날씨 관계로 출발이 늦어진다는 연락이 왔다. 펑펑 내리는 눈... 피할 곳이 없다. 새벽부터 출발하는 등산객들을 위해 커피와 컵라면을 팔고 있는 포장마차도 철수하였으니 꼼짝없이 고통만 당하는 날씨다. 주변을 둘러보니 편의점이 있다. 400원하는 커피는 850원, 어린이용 우산이 13,000원... 우선 추위를 이기기 위해 커피 한잔을 마셨지만 바가지 중 이런 바가지가 없다.
이어 다른 슈퍼를 찾아가니 성인용 우산이 5,000원에 샀으니 앉아서 8,000원을 벌었다. 전에 건빵이 3개 천원인 것을 하나에 천이백 원을 받아 편의점의 터무니없는 가격에 놀라 가지 않기로 다짐을 하였지만 눈보라에게는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컵라면 하니 재미있는 이야기... 라면과 참기름이 싸웠단다. 경찰이 왔는데 라면만 잡혀갔다. 그 이유는? 참기름이 고소해서란다. 그런데 얼마 뒤 라면이 풀리면서 참기름이 잡혀갔다. 그 이유는? 라면이 불어서란다. 맛의 고소와 소송의 고소(告訴)... 불은 라면과 사실대로 말한 불어서의 차이다.
10시가 다 되어 도착하였으니 한 시간 이상은 추위에 떨어야 했다. 눈은 그쳤고 차 안에서 주는 간식에 고마움을 느끼며 버스는 김천으로... 차 안에서 이헌공 여완과 독곡공 석린 할아버지의 생애(生涯)에 대하여 문중 대표들이 설명을 한다. 이헌공 성여완 할아버지의 생애는 앞에서 기술하여 생략하고 독곡공 성석린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친구로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문신인 公은 아버지와 달리 신돈과 대립하여 이성계 등과 함께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내세웠고 조선이 개국하자 훗날 영의정을 지냈다.
공의 자호(自號)가 독곡(獨谷)인데 충숙왕 복위 7년(1338년)에 개성의 독곡방(獨谷坊)에서 공을 낳았는데, 공이 그 지명에 따라 독곡(獨谷)이라 하였단다. 공은 태종 이방원이 태조의 환궁을 권유하려고 함흥으로 보낸 함흥차사(咸興差使)로 가서 모셔왔단다. 하지만 또다시 소요산으로 가서 죽은 아들(방번과 방석)과 사위(경순공주의 부마 이제(李濟)에 대하여 불공을 드렸단다. 공은 다시 찾아갔다고 전한다. 태조가 “너도 너의 임금을 위해서 나를 달래려고 온 것이냐?”라고 의심하자 공은 “만약 그래서 왔다면 신(臣)의 자손은 반드시 눈이 멀어 장님이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단다.
창녕 염수당으로 3... (성주를 지나며) 2016. 3. 8
명신록(名臣錄)에 의하면 공의 맏아들 지도(至道)와 지도의 아들 귀수(龜壽)와 귀수의 아들이 모두 생모의 뱃속에서 배냇병신으로 눈이 멀었다고 하는데 그날 확인을 하지 못하였다. ‘보낸 사람이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함흥差使... 실제로 죽은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함흥차사로 간 박순(朴淳)도 오다가 병사(病死)하였단다.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갈등은 있었지만 천륜(天倫)은 버릴 수 없는 일...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주면서 귀여워함이니, 곧 아버지의 사랑은 맹목적이요. 그만큼 갚은 사랑이라는 지독지애(舐犢之愛)가 생각난다. 바로 부모는 자식을 절대적으로 사랑한다.
김천을 지난 여행길... 성주군을 지난다. 차창 밖으로 내다 본 성주는 비닐하우스로 참외밭일 것이다. 낙동강을 기대고 있어 습한 땅이 많아 수박과 참외의 재배에 적지(適地)란다. 또한 북쪽의 금오산과 서쪽의 가야산을 잇는 산줄기가 겨울의 찬바람과 눈, 여름의 태풍과 비를 막아주고 있다. 특히 참외의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는데 이는 운송비가 수박보다 유리한 이유란다. 노지(露地) 참외보다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는 이유는 요즘 비가 산성비라 바로 썩기 때문이란다. 성주참외의 품종은 ‘금싸라기’로 골이 없고 나일론처럼 매끄럽단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지세가 별 모양을 닮았다 하여 성주(星州)라 불린다. 낙동강과 소백산맥의 명산인 가야산의 수려한 풍광이 조화를 이룬다. 이곳에 사적자로 지정된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이 있다. 세종대왕 아들 18기와 왕손의 태실이 있는데 조선 임금 중에서 왕자가 제일 많은데 여자 편력이 강했을까? 태실은 ‘산 사람의 거주지를 뜻하는 양택(陽宅)의 기(氣)를 받는 곳’이란다. 또한 성산이씨의 집성촌으로 600여 년 이어온 한 개(큰 개울)마을이 있다. 교리댁, 북비고택, 극와고택, 한주종택, 월곡댁, 삼봉고택 등이 문화재다.
그리고 성주읍의 동남쪽에 있는 성산(星山)에는 크고 작은 무덤들이 능선을 따라 밀집돼 있다. 이 고분군은 가야시대 지배집단들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현재 129기가 확인돼 정비와 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성주에는 태실, 한개마을, 성산 고분군 등이 있으니 생(生)과 활(活), 사(死)의 문화가 숨 쉬는 길지(吉地)로 볼 수 있다. 특히 읍성(邑城) 밖에는 왕버들 59주로 높이 20m, 지름 1m이상으로 자라고 있다. 마지막으로 독립운동가로 명성이 높은 김창숙(金昌淑)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여행길은 대구시 현풍을 지나 창녕군이다.
창녕 염수당으로 4... (창녕에서) 2016. 3. 8
본관이 창녕(昌寧)인 성씨(成氏)는 단본이다. 시조는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낸 중윤공(中尹公) 인보(仁輔)이시다. 시조의 득성(得成)은 왕이 하사(下賜)한 사성(賜姓), 외국에서 귀화(歸化)한 증거가 없어 창성(創姓)으로 보고 있다. 시조의 출생연대 역시 확인할 수가 없다. 그래서 공의 가까운 자손 중 현손(玄孫)인 이헌공의 출생연대가 1309년으로 역산(逆算)하였다. 1대를 30년으로 계산해 보면 120년 전인 1189년에 출생하였다고 추정하였다. 또한 시조의 성숙기인 40세에 創姓한 것으로 여겨 1229년으로 보고 성씨(成氏) 역사는 800년으로 추정한다.
창녕에 가까이 오면서 우측으로 중윤공 시조의 산소가 보인다. 시조께서는 조정사(朝正使)로 신년하례를 드리러 송경(松京)에 가셨다가 갑자기 병환을 얻어 돌아가셨다. 아들 시중공(恃中公) 송국(松國)께서 천리부시(千里負屍) 하시어 고향인 창녕으로 오시던 중 현풍현 청산원에 이르렀다. 밤중에 많은 눈이 내렸고 새벽에 깨어보니 시신을 안치한 주변에는 범의 발자국이 있었다. 이를 따라가 지금의 맥산(麥山) 산소 자리에서 범의 발자국은 끝이 나고 눈이 녹아 있었다. 그 자리에 장례를 모시니 자손대대 불멸(不滅)의 명당(明堂)자리란다.
고려 때부터 불리는 창녕(昌寧)은 진흥왕 척경비, 석빙고, 교동 고분군, 술정리에 두 개의 삼층 석탑, 관룡사 대웅전과 용선대 석조 석가여래 좌상 등 문화재가 있다. 또 우리 성씨 문중을 대표한 물계서원과 원정비, 고려 말의 충신인 성사제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 구례 운조루, 강릉 선교장과 버금가는 아석헌(我石軒)이 있다. 영산IC를 나와 부곡면으로... 영산면에도 만년교, 읍성지(邑城址), 향교, 신씨 고가 등이 산재하고 있다. 창녕 관내에는 자연의 신비를 간직한 우포 늪, 억새가 융단을 깔아 논 화왕산, 산토끼 노래비가 있다.
전국 최고의 수온과 수질, 유황천(硫黃泉)으로 뛰어난 약리 효과를 자랑하는 부곡온천을 지난다. 조선시대부터 영산온정(靈山溫井)으로 불리던 이 온천은 1970년대 부곡하와이로 불리면서 여행의 필수 코스였다. 오늘 목적지인 염수당에 도착한다. 많은 종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제사가 봉행되었다. 전통적인 제복(祭服)과 홀기(笏記)를 읽으면서 진행되었는데 笏記를 복사해 나누어주면 쉽게 배울 수 있는데 아쉬움이다. 이곳의 비문(碑文)... 부(部)위원장으로 잘못 새겨졌다. 제사를 준비한 종손... 많은 종원들께 점심을 대접하였으니 그 노고를 헤아릴 길이 없어 종손께 감사를 드리며 마친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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