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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재를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작성자 최진호 [2018-02-05 18: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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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를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파주에 있는 문화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파주 향양리에서 성운주(成雲柱) 묘와 성덕수(成德洙) 묘를 보게 되었는데요.

 

이 두분에 대한 행적이 묘비에 나와있지 않아 이렇게 직접 여쭙게 되었습니다.

 

두 분의 묘가 성혼의 묘 인근에 있어 같은 파로 생각됩니다.

 

성운주의 경우 영조시대의 인물로써 인터넷에 검색이 되는데. 동일인물 인지 궁금합니다. 인터넷에서 성운주라는 인물로 1명이 검색되는데

 

생부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호조좌랑(行戶曹佐郞) 성덕형(成德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후 조봉대부(朝奉大夫)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 성덕장(成德章)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형으로 성천주(成天柱)가 있다. 1759년(영조 35)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54위로 합격하였으며, 관직은 청도군수(淸道郡守)가감역관(假監役官)을 거쳐 한성서윤(漢城庶尹)에 이르렀다. 나라에서 토지 조사를 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때, 성운주(成雲柱)는 직접 돌며 점검을 하였다. 이때 성운주는 황폐한 진전(陳田)에서 거둬들이는 백지징세(白地徵稅)를 징수하지 않았다. 방백(方伯)은 백지징세 100여 결이 빠진 것을 위에 논보(論報)하였으나, 성운주는 백지징세 100여 결을 채우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마침내 황폐한 토지나 몇 해 동안 농사를 짓지 않은 땅의 세금이 감해질 수 있었기에 충청도의 백성들은 조선후기까지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성품이 정밀하고 간략한 장점은 있었으나, 분발하고 면려함에서는 다소 부족하였다. 그래서 교활한 관리들은 성운주(成雲柱)의 확실한 성격을 두려워하였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분이 묘주와 동일인물인가요?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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