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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394년 한양천도와 초대 서울시장 성석린” 학술세미나
작성자 성헌식 [2014-08-19 13: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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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천도 618년 기념 학술세미나 “1394년 한양천도와 초대 서울시장 성석린”가 2012년 11월 24일(토) 오후 2시 (사)국학원 서울국학원 강당에서 열렸습니다.  
가. 학술세미나의 의의와 목적
올해는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지 618년 되는 해이다.
이후 지속적이고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해온 서울특별시는 현재 세계 속의 일류명품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이러한 서울시의 창업역사의 과정과 의의를 학술세미나를 통해 되새기고 이를 시민들에게 적극 홍보함으로써 서울시민들로 하여금 세계 최고의 도시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나. 한양 천도 관련 자료
1. 한양 천도 (漢陽遷都)
1394년(태조3) 10월,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개경은 이성계를 반대하는 전통세력의 기반이 강하게 남아있고, 또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지덕(地德)이 쇠하여 새 왕조에 불길하다고 하며, 그 밖에도 조세미(租稅米)의 수상운송, 군사.지리적 조건 등을 고려해 한양으로 옮겼다.
수도를 옮긴 조선정부는 종묘건축을 시작으로 한양건설을 추진했다. 기본궁전인 경복궁, 별궁인 창덕궁의 건설, 수도의 성곽 쌓기, 오늘날의 청계천인 하수도용 개천 공사 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1395년 한양부를 한성부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1399년(정종1) 왕자의 난으로 잠시 개경으로 수도를 옮기기도 했으나, 1405년(태종5)에 다시 돌아와 이후 한성은 조선의 수도로 확정되었다.
2. 한성부 (漢城府)
서울특별시의 조선시대 때 이름이자 그 지역을 담당하여 관할하는 관청이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태조 이성계는 풍수도참설에 따라 1394년 조선의 도읍을 이곳으로 정하였다. 당시 한성부의 영역은 현재의 종로구 + 중구보다 좁은 지역이다. 한성부는 정2품인 한성판윤이 최고 책임자였다. 하부 행정구역은 오부와 방(坊)과 계(契)·동(洞)으로 구성되었다. 15세기 초 인구는 10만 명 정도였다. 세종 때에는 약 20만의 인구를 가진 대도시로 성장했다.
3. 초대 서울시장의 임명 (조선왕조실록 태조 4년(1395) 6월 13일)
“ 성석린(成石璘)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신의(鄭臣義)를 한성부 윤, 우인열(禹仁烈)을 개성 유후사 유후(留後), 노숭(盧崇)과 정남진(鄭南晉)은 부유후를 삼았다.”  



다. 학술세미나 행사순서

1부 : 한양천도 618년 기념식                (사회: 안영택)
◈ 개회사, 국민의례, 내빈소개
◈ 기념사             성 배 경 (사단법인 국학원 서울국학원장)
◈ 격려사             성 낙 흔 (창녕성씨 대성회 회장)
◈ 격려사             성 병 석 (창녕성씨 독곡공파종회 회장)
◈ 건의문 낭독 및 전달

2부 학술세미나 발제                         (사회:  성헌식)
◈ 초대 서울시장 성석린의  약력소개 (사회자)              
◈ 제1 발제  제  목 :  “려말선초의 명신(名臣) 성석린”
             발제자 :   홍순석 (강남대학교 교수)
◈ 제2 발제  제  목 :  “마지막 함흥차사 독곡 성석린”
             발제자 :   성낙구 (안성문화원 연구위원)
◈ 제3 발제  제  목 :  “초대 서울시장 독곡 성석린”
             발제자 :   성교진 (철학박사, 전 대구카톨릭대학교 교수)
◈ 질의 및 토의

 

성훈경 2017-06-19 13:05:05
◈ 독곡공 성석린(成石璘) [1338~1423]
개 요

독곡공 성석린(成石璘) 어서각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본관 : 창녕
호 : 독곡
별칭 : 자 자수, 시호 문경, 창녕부원군


설 명

성석린(成石璘)
1338(충숙왕 복위 7)∼1423(세종 5).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 아버지는 부원군 여완(汝完)이다. 또한 조선왕조 개창후 최초의 한성부판사(서울특별시장)에 임명.
1357년(공민왕 6)에 과거에 급제, 국자학유(國子學諭)의 벼슬을 받았으며, 승진하여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이제현(李齊賢)이 국사를 편수하면서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그로 하여금 항상 글을 짓게 하였으며, 예문관(藝文館)의 공봉(供奉), 삼사(三司)의 도사(都事), 전의시(典儀寺)의 주부(注簿) 등을 지냈다.

공민왕도 그를 중용하여, 차자방(箚子房:뒤의 尙瑞院)의 필도치로 등용하였으며, 다시 전교시부령(典校寺副令)·지인상서(知印尙書)·예부총랑(禮部摠郎) 등을 역임하였는데,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서 외관으로 해주목사가 되었으나, 이내 내직으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삼사좌윤(三司左尹)·밀직사 좌부대언(密直司左副代言)·지신사(知申事)·제학(提學) 등을 지냈다. [성석린 필적]

1380년(우왕 6) 여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에 침입하자 원수(元帥)가 되고 양백연(楊伯淵)이 그의 부장(副將)이 되어 이를 맞아 싸웠다. 여러 장수가 왜적의 기세에 눌려 후퇴하려 하자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여, 여러 장수가 이에 따라 적을 무찔렀다.

그해 가을 양백연의 옥사에 연루되어 그도 함안에 유배되었다. 다시 부름을 받아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지고 바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외직으로 양광도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使)가 되어 주·군에 의창(義倉)의 설치를 건의하자, 조정에서 이를 채택하여 모든 도에서 행하도록 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문하부평리(門下府評理)와 대사헌이 되었다.

이성계(李成桂)의 역성혁명에 참여하여 단성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의 녹권(錄券)이 내려지고 창성군 충의군(昌成郡忠義君)에 봉하여졌다. 태조가 즉위하자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가 되었고, 1392년(태조 1) 개성부판사(開城府判事)를 거쳐 한성부판사를 지냈으며, 원종공신이 되어 노비 3인, 토지 30결을 하사받았다.

정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도절제사(都節制使)·평양부윤을 지내고, 내직으로 문하시랑찬성사가 되고, 익대공신(翊戴功臣)의 녹권이 내려지고,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에 올랐다가 곧 좌정승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여 좌명공신(佐命 [성석린 좌명공신왕지] 功臣)이 되고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다.

1403년(태종 3) 우의정, 1407년에 좌의정을 지냈고, 1411년 사직을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1414년 부원군으로 휴직하였다. 1415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다시 부원군으로 물러나서 쉬니 궤장이 하사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에 태조가 함흥으로 행차하여 머무니, 태종이 여러 사자를 보냈으나 감히 문안을 전달하지 못하였는데, 성석린은 태조의 옛 친구로서 조용히 인륜의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진술, 비로소 태조와 태종이 화합하게 되었다.

그는 검소한 생활을 즐겼으며, 초서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었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쉬는 곳에는 항상 한 나무궤를 놓아두고 앉아 ‘양화(養和)’라고 이름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 성석린 좌명공신왕지 : 보물 제746호. 제2차 왕자의 난의 평정에 공을 세운 성석린에게 내린 태종의 사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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