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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녕성씨의 유래
작성자 성관* [2018-12-15 18:4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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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성씨유래.hwp
十三파의 형성.egg

■창녕 성씨의 연원
우리 창녕 성씨의 시조는 고려 때 호장(戶長) 중윤을 지낸 인보(仁輔)이시다.
「조선씨족통보 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의 부친은 신라 때 대관(大官)인 성저(成貯)의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성씨약사 成氏略史」에는 시조 인보께서 고려 문종 때 우리 성씨를 처음 만든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족보 외 문헌사료에도 시조는 인보로서 윗계보는 밝혀지지 않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니 이것이 우리 성씨의 유래이다.「국조문헌」에는 주(周)나라 문왕의 일곱째 아들인 성(?)나라 숙무(叔武)의 후손들이 나라이름을 따서 성씨(?氏)로 삼았는데 뒤에 초나라에게 멸망되자 ?을 떼고 성씨(成氏)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승인문학원」에는 당나라 때 학사(學士)로 상곡(上谷) 출신인 성경이 있었는데 동쪽에 있는 조선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우리 역사기록에 성씨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기원전 108년 북부여의 번조선과 한나라와의 전쟁 때 번조선의 신하 5명이 작당해 우거 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할 때 끝까지 나라를 지키다가 암살당한 성이(成已) 장군이 있다. 그 후 백제에는 의자왕 때 충신성충(成忠)이 있었으며, 신라 때에는 성저(成貯)가 등장하나 시조 인보와의 연관성은 알수가 없다. 그리고 고려 때 중윤호장 숙창(中尹戶長 淑昌)이란 분이 시조 인보(仁輔)를 낳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조공 유래(始祖公 由來)
소재지 : 경남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504번지
우리 창녕성씨의 시조는 고려중기때 창녕지방의 토호(土豪)였으며 향직의 으뜸인(城主) 호장 중윤 이셨던 성인보(成仁輔)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고려문종(1047-1082)부터 성(姓)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할수 없게 제도화 함으로서 고려 고종때(1214-1259) 지방 통치권자로서 성씨의 성(姓)을 창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그 상계는 밝혀지지 않는다.
시조께서는 정초 지방관리의 임무인 예궐숙배(詣闕肅拜)차 조정사(朝正使)로 송경(개성)에 입경 하였다가 병으로 별세 하시니 조정에서 우마차와 장례비를 내렸으나 아들인 시중공(侍中公)께서는 사양하고 지게로 몸소 시신을 지고 천리길을 여러날만에 창녕 청산원에 이르러 가숙하셨는데 밤사이 눈이온 후 아침에 보니 범의 발자국이 시신으로부터 서쪽 자그마한 산등성이에 범의 발자국이 멈춘곳에 쌓인 눈이 묘자리 만큼 전부 녹아있어 길일을 택해 안장 하시었으니 이곳이 지금의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맥산이다.
■成松國(二世 )
부친(父親) 시조(인보)께서 조정사(朝正使)로서 신년하례(新年賀禮)를 드리기 위하여 송경(宋京)에 갔다가 병으로 별세하셨다. 公은 천리 먼 길을 부친의 시신(屍身)을 지고 고향인 창녕까지 와서 맥산에 모셨다.
公(侍中公 諱 松國)이 천리의 먼 길을 시체를 지시고 고향인 창녕으로 오시는데 창녕(昌寧)의 청산원(靑山院)에 이르렀다. 마침 해가 저물어 원(院)의 문밖에서 가숙(假宿) 하셨는데 밤에 갑작이 큰 눈이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범의 발자국이 시체 밑에서부터 시작하여 앞산으로 간 것이 있었다. 이상히 여겨 발자국을 따라가보니 지포(池浦) 뒷산머리에 이르러 그쳤는데 그곳에만 눈이 녹았으며 넓이가 자리 하나 깔만하였다. 마침내 이곳에 장례를 모시니 창녕현(昌寧縣) 맥산(麥山)으로 해좌사향(亥坐巳向)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천신(天神)을 감동(感動) 시켜서 대지(大地)를 얻었고 자손이 대대로 현달(顯達) 하였다고 한다. 公이 별세하시고 미쳐 장례(葬禮)를 치르지 못했는데 산사(山寺)의 중이 찾아왔다. 여러 상제들이 매우 공경히 접대하자 중은 그 의(義)에 감동하여 왜 아직까지 장례(葬禮)를 모시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아직 장지(葬地)를 구하지 못했다고 대답하자 중이 한 혈(穴)을 지점(指點)해 줌으로서 장례(葬禮)를 모시니 이곳이 바로 경남 창녕군 이방면 대곡리 우항산(慶南 昌寧郡 梨坊面 大谷里 牛項山) 인좌(寅坐)이다. 이곳은 영남(嶺南)의 삼대명당(三大明堂)중의 하나라고 한다.
창녕(昌寧)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주향(主享)되셨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공필(公弼)은 전객부령(典客副令)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한필(漢弼)은 도첨의 문하찬성사(都僉議 門下贊成事)였다. 판도판서(版圖判書)는 세 아들을 두었으니 혜암(惠巖)은 대선사(大禪師)였고 군미(君美)는 판도총랑(版圖摠郞)이며 군부(君阜)는 중낭장(中郎將)이었다. 찬성(贊成)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군백(君百)은 광정대부 문하평리(匡靖大夫 門下評理)였고 군보(君補)는 문하평리(門下評理)였다. 총랑(摠郞)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한충(漢忠)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었으며 여완(汝完)은 부원군(府院君)으로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다. 중낭장(中郎將)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준득(準得)은 총부상서(摠部尙書)였고 유득(有得)은 정승(政丞)이었으며 윤득(允得)은 지신사(知申事)였다. 광정대부(匡靖大夫)의 아들 이(履)는 문하시랑(門下侍郞)이었으며 평리(評理)의 아들 저(貯)는 선부전서(選部典書)였다. 한성판윤(漢城判尹)의 아들 기(紀)는 판서(判書)였고 부원군(府院君)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석린(石璘)은 영의정(領議政)으로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고 석용(石瑢)은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으로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며 석연(石珚)은 이조판서(禮曹判書)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고 시호(諡號)는 정평(靖平)이며 석번(石璠)은 낭장(郎將)이었다. 상서(尙書)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연(連)은 판서(判事)였고 준(遵)은 중서시랑(中書侍郞)이었다. 정승(政丞)의 아들 사제(思齊)는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으로 시호(諡號)는 정절(貞節)이다. 지신사(知申事)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태준(台俊)은 사인(舍人)이었고 사준(士俊)은 좌랑(佐郞)이었다. 시랑(侍郞)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갑신(甲臣)은 평리(評理)였고 을신(乙臣)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으며 전서(典書)의 아들 언신(彦臣)은 지림주사(知林州事)였다.  
■물계서원 (勿溪書院)
소재지 :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79
문화재지정
물계서원소장책판 -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66호(1990.01.15지정)
물계서원 원정비 -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66호(2005.01.13지정)
배향인물
성송국(成松國), 성삼문(成三問), 성담수(成聃壽), 성수침(成守琛), 성운(成運), 성제원(成悌元), 성혼(成渾), 성윤해(成允諧), 성여완(成汝完), 성희(成熺), 성수경(成守慶), 성문준(成文濬), 성람(成?), 성여신(成汝信), 성안의(成安義), 성준득(成準得), 성석린(成石璘), 성언충(成彦忠), 성사제(成思齊 ), 성승(成勝), 성수종(成守琮)
창건연도 : 1712년(숙종 38) 향사일 : 2월 중정(中丁)
▶ 연혁 : 1712년(숙종 38)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성송국(成松國), 성삼문(成三問), 성담수(成聃壽), 성수침(成守琛), 성운(成運), 성제원(成悌元), 성혼(成渾), 성윤해(成允諧)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성여완(成汝完), 성희(成熺), 성수경(成守慶), 성문준(成文濬), 성람(成?), 성여신(成汝信) 등을 추가 배향하고, 1814년(순조 14) 성안의(成安義), 1857년(철종 8)에 성준득(成準得)을 추가 배향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89년 서원을 복원하고 1997년에는 영의정 문경공(文景公) 성석린(成石璘), 진사 성언충(成彦忠)을 추가배향하였다.
▶ 건축물 : 사우인 숭덕사(崇德祠), 신문인 현도문(顯道門), 강당인 중부당(中孚堂), 정문인 이현문(?賢門)이 일직선을 이루며 전학후묘의 배치를 보인다. 강당 앞의 동재인 일치재(一致齋)와 서재인 겸해재(兼該齋)가 갖추어져 있으며, 강당의 동편에는 유물각인 영보각(永寶閣)이 있다. 부속 건물로는 제수를 장만하는 전사청, 관리사, 관리사 문 등이 있어 규모가 매우 크다. 숭덕사는 3칸, 신문도 3칸 규모이다. 강당은 전면에 물계서원 현판을 달았으며 6칸 규모 중 3칸은 방으로, 가운데 3칸은 당으로 구성되었다. 동재와 서재는 전형적인 3칸 규모를 이루며 , 영보각은 3칸 건물이다.
▶ 중요 물건
1) 물계서원 원정비 (勿溪書院院庭碑) -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66호 (2005년 지정)
물계서원 원정비는 건립연대가 1790년(정조 14)으로 확인되는바 시기상으로 보아 200년 이상이 되었고, 형태면에서도 18세기 후기에 많이 보이는 비석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옥개석 양 측면에 조각되어 있는 쌍조의 모습과 옥개석 앞뒤 밑 부분에 2단씩 조각되어 있는 연목(椽木=서까래) 형식은 목조가옥의 지붕을 연상케 해주어 독특한 감이 있으며, 이 비석의 비문 내용으로 보아서 물계서원의 유래와 배향인물 19명의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경우 친자인 이복원(李福源)은 후일 정조 때 우상(右相)과 좌상(左相)을 역임한 인물로 학행이 있었고, 글쓴이 조윤형(曺允亨)은 당시 필법으로 명성을 떨친 분으로 이 원정비의 격을 한층 높여 주고 있다.
2) 물계서원 소장 책판 -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66호 (1990년 지정)
가로 22㎝, 세로 49㎝의 규모를 지닌 이것은 성리학의 대가 성혼(成渾)선생의 문집책판으로 284매로 되어있다. 우계문집(牛溪文集)은 원집 6권과 속집 6권으로 1621년(광해군 13)에 성문준, 김집, 안방권 등 우계문인들이 우계집을 발간했는데, 이것이 우계집의 원집이었다.
우계속집은 숙종 8년에 공주감영에서 간행되었고 중간본은 1809년(순조 9) 성금주가 원집과 속집을 합쳐서 밀양에서 간행했는데, 우계원집이 광해군 초에 만들어진 까닭에 당시 집권당이 꺼려하는 부분은 많이 삭제되어 다시 속집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① 두문동 선생 실기책판 (杜門洞先生實記冊板)
태조 이성계의 등극을 반대해 만수산에 들어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고 삶을 마쳐 고려조에 대한 절의를 나타내었던 정절공 성사제 선생(貞節公 成思齊先生)의 행적과 개성(開城)의 표절사(表節祠)에 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직제학 벼슬을 지냈던 정절선생의 인품이 잘 나타나 있는 이 판각(板刻)은 총 33매로 가로22㎝, 세로53㎝이다.
② 창녕성씨 문행열전 책판 (昌寧成氏文行列傳冊板)
도학이나 문장 혹은 충헌, 정절, 덕망 등이 뛰어나 국사와 야사에 실린 창녕 성씨 명현(名賢) 147명의 행적을 기록한 목판으로 일찍이 선세의 행적을 모았던 문헌지(文獻誌)가 유실된 관계로 1884年 성근묵과 성재숭이 공저로 펴낸 책자의 판각이다. 총 70매이며, 고종 37年 3月(1900)에 창녕군 이방면 안리의 우항제(牛項齊)에서 조각한 것이라 전한다.
③ 성시중 효행록 책판 (成侍中孝行錄冊板)
총 46매 판각으로 조선 영조 8년(1732)에 조각하고 시중공(侍中公)의 14대손인 성환(成換)이 편집한 이 효행록은 시중공이 부친의 시신을 지고 먼 길을 온 일화 그의 효행들을 싣고 있으며, 그밖에 이 서원에 배향된 나머지 18현의 행적, 그리고 물계서원의 연혁과 상량문(上樑文), 춘추향제물(春秋享祭物), 규식도(規式圖), 소목열시도(昭穆列侍圖) 등이 기록되어있다. 시중은 고려조의 수상격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물계서원(勿溪書院)의 주향(主享)인 성송국(成松國)을 일컫는다.
④ 창녕성씨 만력보책판 (昌寧成氏萬曆譜冊板)
명나라의 만력(萬歷) 44년 병진년에 판각했다하여 만력보(萬曆譜) 혹은 병진보(丙辰譜)라고 하는 이것은 창녕성씨의 족보를 말하는 것으로, 광해군 8년(1616)에 창녕읍 옥천리의 관룡사에서 조각하여 물계서원에 소장되었다가 서원이 철폐되면서 맥산재(麥山齋)의 영보각에(永寶閣) 옮겨져 보관되어 오고 있다. 최초의 창녕 성씨 목판본으로 가로 28㎝, 세로 68㎝, 22매의 목판이 대체로 잘 보존되어 오고 있다.
⑤ 창녕성씨 기축보 책판 (昌寧成氏己丑譜冊板)
조선 숙종 35년(1709) 기축년(己丑年)에 새긴 이 판각은 그 당시 흥해 현감(興海縣監) 성환(成換)이 만력보에 이어 다시 만든 창녕성씨 족보이다. 경북 영일군 흥해의 천곡사(泉谷寺)에서 가로28㎝, 세로28㎝로 189매 만들어져 천곡사의 장보각(藏譜閣)에 보관되었다가 물계서원을 거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족보의 수보사(修譜史)
족보는 종족(宗族)의 역사이며 가문의 이력서이다. 유구한 문화와 화려한 업적을 남기신 조상들의 얼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 종족의 전통문화와 풍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필수불가결한 보전(寶典)이다
우리 문중의 족보를 처음 발간한지 어언 520년이나 되었다. 우리 창녕 성씨의 수보사를 더듬어보면, 성원(成源)의 고보(古譜)에 이어 판관 성중성(成重性)께서 성종 14년(1493)에 계축보(癸丑譜)를 발간한 이래 대보(大譜) 및 파보(派譜)와 세보(世報)를 수십차례 간행했다.
12세 창산군 수익(昌山君 壽益)께서 속보(續譜)를 만들어 간행코자 했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해 난중에 돌아가셔서 발간치 못하다가, 셋째 아들이신 연강공 진선(烟江公 晉善)께서 18년간 자료를 더 수집해 경상도관찰사로 계실 때 족보를 간행케 되었으니 이것이 광해군8년(1616)에 발간된 만력병진보(萬曆丙辰譜)이다.
그 후 유촌공 환(柳村公 煥)께서 숙종 35年(1709) 기축년에 창녕 성씨의 로상(路上)파와 로하(路下)파가 서로 동성이족(同姓異族)으로 알려져 있던 것을 시중공 송국(侍中公松國)의 두 아들 공필(公弼)과 한필(漢弼)이 한 형제임을 밝히고 합보(合譜)를 발간하니 이것이 기축대보(己丑大譜)이다. 또한 공께서는 창효사(昌孝寺)와 세덕사, 물계서원(勿溪書院)을 창건해 8분의 선현(先賢)을 배향하셨다.
■문절사(文節祠)
소재지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문절사길 51-5
매죽헌 성삼문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성삼문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사육신의 한사람이다.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세종 20년(1438)에 과거 중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집현전 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그는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하기위하여 요동의 황찬을 만나러 13차나 왕래하여 1446년 10월 9일에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박팽년, 이개, 하위지 등과 단종복위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고, 세조에게 모진 고문을 받다 능지처사를 당하였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절신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에게 숭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일뿐 아니라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문명이 높았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문절사는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문절사길 51-5 부락의 북쪽에 있으며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을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 지붕이다.
현재 문절사라고 하는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사액한 현판이며, 위패는 공주 동학사 숙모전과 물계서원에 배향되어 있으며, 묘소는 노량진 사육신 묘역과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에 일지총이 있다. 홍성에는 성삼문 사당을 비롯한 육신 가묘가 조성되어 있으며 부모묘소 성승장군과 배우자 연안김씨 묘가 있다.

13파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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